Celgen 10. 이별과 재회에 관한 단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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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823 작성일 2021-11-03 11:26본문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대학입시용 정도로 치부하고 외웠던 사람들은 구절구절에 숨어 있는 사랑과 이별의 서사를 알 리가 없다. 시를 음미할 생각은 없이 ‘일제에 빼앗긴 조국에 대한 애통함을 표현했다’고 추측하는 국어 참고서를 달달 외우다 보면 당연히 그렇게 된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그래. 사랑이란 게 원래 그 모양이다. 어떻게든 내 연인으로 만들어 보려고 안달할 때는 하늘에 걸린 달이라도 따다 줄 것처럼 절대사랑을 약속하지만 마음이 식고 난 뒤 그 약속은 야속하리만큼 무의미해진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연인 간의 관계는 첫 키스를 주고 받으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첫 키스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버린 경우가 늦가을 낙엽같이 수북하다. 문제는 상대가 나를 떠나갔다고 해서 첫 키스가 바꿔놓은 인생이 원상복구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이건 사랑을 꿈꾸는 이들에게 주는 엄중한 교훈이다. 헤어질 걱정 미리 하면서 썸만 타지 말고 마음이 가는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올인해라. 썸타면서 이리저리 재고 대비한들 문득 이별의 순간이 오면 어차피 속수무책이다.
그렇다. 모든 이별은 속수무책이다. 연인이 헤어지고, 부부가 이혼하고, 친구가 등을 돌리고, 동업이 깨지는 과정들을 보면 충분히 막을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손쓸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대부분 이별은 어느 날 갑자기 냉정하게 돌아서는 식으로 시작되지도 않는다. 마이클 잭슨의 Moonwalk처럼 분명히 내게 다가오는 것 같은데 희한하게 점점 거리가 멀어지다가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면 나를 등지고 서있는 모양새로 이별은 진행된다. 딱히 누구의 잘못이라고 못박기도 곤란한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이별은 아프다.
한 부부의 실화. 남자가 여자 집 문앞에서 밤새 무릎꿇고 간청해 결혼에 골인했다. 눈망울이 호수 같은 아이를 낳고 잘사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바람을 피워 딴 살림을 차렸다. 죄인은 남편인데 아내는 아이마저 뻇기고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3년 뒤 실의에 빠져 인생을 포기하다시피 살아가던 아내에게 남편이 찾아왔다. 지난 일을 반성하고 재결합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묘하다. 아이만 되찾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참겠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던 여자가 자기 앞에 고개 숙인 남편을 매몰차게 밀어냈다.
세월이 흘러 중년에 접어든 그 여자에게 ‘그때 왜 전 남편을 받아주지 않았냐'고 물었다. 여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헤어지는 게 쉽나요'라고 답했다. 헤어지는 게? 다시 만나는 걸 물었는데 왜 헤어지는 걸 말했을까. 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이별의 기억이 너무 아파 금쪽같은 아이를 포기하더라도 재결합할 엄두를 못냈나보다고 추측할 뿐이다. 다행히 아이는 나중에 엄마에게 돌아가 성인이 돼 집을 떠날 때까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이별을 통고하는 사람도 웬만하면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찾아가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미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세월이 아쉽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면 좋은 소리 듣기는 글렀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떻게든 자기 명성에 흠집이 안가게 해보려고 애쓰기도 한다. ‘사랑하니까 헤어진다’거나 ‘언제 어디선가 더 나은 모습으로 나타날게'라는 둥 별로 말이 안되는 횡성수설을 늘어 놓는다. 다 소용없다. 그런다고 헤어짐을 당하는 이의 무너지던 가슴이 몸에 다시 붙지는 않는다. 자칫하면 증오를 더 부추길 수도 있다. 이왕 헤어질거면 아픔을 인정하고 서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헤어진 사람은 다시 만난다. 연애의 아이러니 중 하나가 이별한 커플은 꼭 애매한 시각, 애매한 장소, 애매한 상황에 마주친다는 것이다. 만해는 이별의 순간에도 다시 만날 것을 굳게 믿는 오매불망의 사랑을 노래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도 대개 이별이 영원한 끝이 아닐 확률이 높다. 물리적으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다시 만난다. 지인들이 전하는 근황을 통해, 또는 갑작스런 부고문자를 받아서. 만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어떤 방식이든 헤어진 사람과 다시 만나는 것은 상당한 감정 소모를 일으키는 일이다. 어색해서, 불편해서, 얼굴만 봐도 짜증나서 감정이 소모된다. 반대로 혹시 재회의 희망에, 또는 얼굴만 다시 봐도 가슴이 쿵쿵 뛰어서 감정이 소모되기도 한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옛 연인의 근황이 안주로 오르는 걸 듣다보면 짜증과 그리움이 교차한다. 부고문자의 이름 석자가 바로 그 사람 것이면 아무리 아픈 이별을 한 사이라 해도 감정이 소용돌이 치기 마련이다. 김승옥의 단편 <생명연습>이 그런 얘기를 담고 있다. 불타오르던 사랑에 작심하고 얼음물을 끼얹어 내친 연인 ‘정순’이 훗날 같은 과 동료 교수의 아내가 돼 인생에 다시 쑥 들어온 사연이다. 난감한 일이다.
재회의 또다른 문제는 기억의 불명확성이다. 헤어져 있던 기간 동안 내 머리 속에서 과거의 추억이 반복적으로 미화되는 것 때문이다. 머리 속에는 오랜 시간 덧칠된 추억의 왕자나 공주가 앉아 있는데 정작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그 사람은 누추하다. 거꾸로 아픈 이별을 준 그 놈이 내 기억 속에서 계속 찌질이로, 악당으로, 사탄으로 진화해 왔는데 우연히 마주한 모습은 수트 입은 슈가나 지민이 같아 보인다면 그것 또한 속쓰린 사태다.
그래서 이별이 이별로 끝나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피천득의 <인연>에 나온 이별이 그렇다.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어릴 적 자신을 오빠처럼 따랐던 아사코가 초라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두번 만남으로 영원한 이별이 됐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한다.
물론 만해가 <님의 침묵>에서 꿈꾼 것 같은 극적인 재회도 없지 않다. 그런 재회 얘기를 하면 적지 않은 이들이 영화 <첨밀밀>을 꼽을 것이다. 홍콩에서 헤어져 10년 넘게 소식이 끊겼던 장만옥과 여명이 하필 지구를 반바퀴 돌아 뉴욕 맨하탄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모습.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가슴 뭉클한 해피엔딩에 흡족해 하면서도 ‘에이 이게 말이 되냐'고 웃었는데 인생 경험을 좀 더 하고 다시 봤을 때는 ‘충분히 가능하다'는데 표를 던졌다. 세상에는 정말 별 일이 다 벌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하는 사람들은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떠나는 사람은 모퉁이만 돌면 모든 게 시원하게 끝이라고 조급해하지 말고 가급적 오래 상대와 대화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줘야 한다. 떠나보내는 사람도 아프다고 너무 몸부림 치지 말고 가능한 한 담담한 모습으로 보내줘야 한다. ‘가지 마세요’라며 흙바닥에 주저 앉아 바짓가랑이를 잡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갈테면 가라.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보자.' 이것도 아니다. 담담함이 오히려 상대의 기억에 더 오래 남아 미안함으로, 고마움으로, 심지어는 두려움으로 작용할 수 있다.
본의와는 다르게 서로가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사람들은 좀 거창한 약속을 해도 좋다. 마이클 만 감독의 <라스트 모히칸>에서 적들에게 잡혀가는 연인 매들린 스토우를 향해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렇게 외친다. “Stay alive no matter what occurs. I will find you no matter how long it takes!“ 고별사가 이 정도 포스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다고 하겠다.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이별은 누구나 하는 것이다. 아픈 이별이든, 그저 그런 이별이든 우리는 늘 이별하고 다시 만난다. 어떻게 보면 젊은 시절 이별의 아픔 때문에 가슴을 쥐어짜며 몸부림치는 것도 특권 중에 하나일 수 있다. 그러면서 사람은 무르익어 간다. 이별할 때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는 이별이 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님의 침묵>에서 처럼 너무 슬퍼만 말고 감정의 동요를 새 희망의 원동력으로 삼아보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재한 감독의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가장 아픈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싸워서 헤어지고, 바람나서 헤어지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수많은 이별이 있지만 영화 속 손예진과 정우성 부부의 이별에는 상대가 못된다. 알츠하이머 때문에 기억이 사라져가는 아내. 그동안 서로 알콩달콩 나눴던 사랑의 일상이 얼마 못가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진다는 걸 아는 두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아내의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둘은 완벽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겠지. 그들은 전과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아내가 모르는 남자라고 싫어하면 어쩌지? 그럼 달아나야 하나? 반대로 어쩌면 기억은 사라져도 사람은 남았으니 헤어진 게 아니랄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뭐. 이 여자의 호불호와 장단점을 다 알고 시작하는 건데 아예 처음 하는 것보다는 쉽지 않겠어?
글쎄 모르겠다. 수진(손예진 분)은 오히려 편하다. 불가피한 이별이었지만 아파해야 할 대상조차 잊게 됐으니. 그러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별은 어렵다. 아픔을 잊기 위해 함께 했던 추억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게 맞는건지, 아니면 엄연한 내 삶의 한 조각으로 잘 닦아 보관해 둬야 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기억이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지는거야' (수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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